학교 앞에 집을 알아 보러 갔다.
북한산을 바라보며 마테 호른을 보고 싶어졌다. 알프스 산맥과 갠지즈 강의 공기가 궁금하다. 알제리와 튀니지는 왠지 멋질 것 같았다.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졌다.
노원구는 아파트 숲이다. 난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무섭다. 내 악몽은 늘 아파트 미로에서 길을 잃고 무언가에 쫓기는 꿈이다. 아침마다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 보내고, 준중형차 한 대를 타고 남편이 출근하면, 아내는 가구를 리폼하고 저녁 식사를 차린다. 34평형 아파트에는 거실, 방 세 개, 화장실 두개, 베란다 세 개. 거실에는 검은 가죽소파와 무식하게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다. 필요한 물건은 이마트에서 사오면 된다.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똑같은 구조의 집에서 중산층인 척 하고 사는 이 동네가 싫어 죽겠다. 그런데 모두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만 사는 그 단칸방은 더한 게 아닐까.
다닥다닥 붙은 집, 샤워기는 있지만 발을 어디에 딛고 씻어야 할지 모르겠는 화장실, 창문을 열자마자 눈 앞에 벽만 보이는 집도 있었다. 물론 내가 그런 집을 보고 '싫다'고 할 수 있는 건 내 삶의 수준이 그동안 매우 양호했기 때문이니까 고마운 거다. 하지만 왜 내 창문에 초록색 판떼기를 붙여서 시야를 가려야만 하지?
내가 그런 집에 살면서 학비와 집세와 생활비를 소비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일까. 나는 기꺼이 '학교에 가는 것이 기대되고 신나 죽겠다'고 말하지 못한다. 그런데 이 시간과 돈은 무얼 위해 쓰는 걸까. 분명 이유가 있었는데 이젠 기억이 안 난다.
자유롭지 못한 것은 괴롭다. 두려움으로부터, 돈으로부터, 정해진 삶의 형식으로부터, 집착으로부터.
2014. 7. 26. 23:44